촛불정국 두 달을 지내면서 생각했습니다. 아니, 대선 이후 반 년 넘게 생각했습니다.
'대통령 중임제였다면 이명박 대통령이 저렇게 밀어붙였을까?'
'이원집정부제였다면 국정이 저렇게 한쪽으로 쏠렸을까?'
'내각제였다면 촛불이 두 달 넘게 거리에 머물렀을까?'
아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국정 스타일과 국민 참여가 이렇게까지 경직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등을 밀더군요. 여기저기서 고개를 드는 개헌론에 눈길을 주게 만들더군요.
‘그래, 이제 개헌을 할 때가 된 거야.’
2.
근데 이게 웬일입니까?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글 몇 편이 성큼 다가오더군요.
김성호 연세대 교수가 어제 <동아일보>에 칼럼을 실었습니다. 제헌 60주년을 맞아 개헌을 생각하는 글이었습니다.
이 글에서 김 교수가 질타하더군요. “변하는 것이 있으면 불변하는 것도 있어야 한다”며 “급진적인 신자유주의 개헌을 어찌 그리 쉽게 말하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습니다. “개헌 논의를 선도하는 보수”를 향한 비판이었습니다. 건국헌법에 반영된 ‘삼균주의’를 불변의 가치로 전제해 놓고 보수의 ‘방임적 자유시장주의’를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 “(건국헌법의 창조적 재해석이) 없이 세계와 시장과 실용만을 되뇔 때 ‘대한민국’은 가고 ‘보수’만 남는다는 우려, ‘딴 나라 보수’라는 비아냥거림을 외면하기 힘들어진다”고 질타하는 것이었습니다.
김 교수의 우려는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에서 더욱 명징하게 확인됐습니다.
남 전 장관 역시 “신자유주의적 개헌”을 크게 우려했습니다. 보수세력이 국회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헌을 추진하면 헌법 제119조 2항이 폐지될 공산이 크다고 했습니다. 권력구조 개편에 “정신이 팔려 얼떨결에 개헌 논의에 올라타다 보면 결국은 헌법 제119조 2항 폐지운동의 길라잡이가 되고 말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남 전 장관이 폐지를 우려하는 헌법 제119조 2항은 ‘경제 민주화’ 조항입니다. 국가가 시장에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 조항입니다. 이런 내용이지요.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 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여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읽고 또 읽으니 정말로 끔찍해지더군요. 국가의 시장개입을 차단해 버리면, 그래서 자유주의라는 미명으로, 시장 원리라는 명분으로 모든 걸 경쟁과 우열의 게임에 몰아넣으면 삶의 질이 어떻게 될지는 자명한 일입니다. 절대 다수의 국민이 사자에 쫓기는 사슴 같은 신세가 되겠지요.
마음을 고쳐먹어야 했습니다.
‘개헌? 간단한 게 아니네.’
3.
왜일까요? 그래도 미련이 남습니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 대통령 한 사람에 의해 나라가 좌지우지 되고, 단 한 번의 선거로 국정 운영이 5년 동안 경직되는 현상은 분명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미련이 집착을 낳는다고 하던가요?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원 포인트 개헌만 할 수는 없을까?’
4.
정치부 기자 선배가 이 미련에 냉정하게 칼을 꽂더군요.
“불가능해.”
이 선배의 전망은 아주 간단했고 대단히 명쾌했습니다.
권력구조만 손대는 원 포인트 개헌이 이뤄지려면 이명박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일부를 내놓아야 가능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중임제든 내각제든 이원집정부제든 손질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덧붙이더군요.
“대통령이 임기를 내놓겠니?”
따져보니 그렇더군요. 제18대 국회의원 임기는 2012년 5월까지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는 2013년 2월까지입니다. 원 포인트 개헌이 이뤄지려면 이명박 대통령이 60개월의 임기 가운데 9개월을 ‘반납’해야 합니다.
가능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리를 했죠.
‘그래, 개헌은 불가능 해.’
5.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집중 제기되는 개헌론이 낯설게 다가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보수’로 통칭되는 정치인과 언론이 먼저 개헌을 제기합니다. 줄기차게, 그리고 다양하게 제기합니다.
왜일까요? 이명박 대통령이 작심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을, 그것도 집권한 지 반 년도 되지 않은 정부 밑에서 제기하는 걸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은 ‘보수’ 성향의 대통령에 치명타가 될 수도 있는 개헌을 왜 제기하는 걸까요?
‘여차하면’으로 읽으면 어떨까요? 여차하면 판을 새로 짤 수 있다고, 그러니 잘 하라고 대통령에게 시그널을 보내는 걸로 해석하면 어떨까요?
‘차제에’로 읽으면 어떨까요? 차제에 대한민국 헌법에서 ‘붉은 기운’을 도려낼 수 있다고, 그러니 준동하지 말라고 진보세력에 경고하는 걸로 분석하면 어떨까요?
제 짧은 머리로는 이것 외에 다른 맥락을 발견하기가 힘듭니다. 이제 개헌을 할 때가 됐으니까, 모두가 개헌 필요성을 인정하니까 그냥 제기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기엔 개헌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면면이 너무 화려합니다. 정치적 내공이 너무 깊고 정치적 계산이 매우 뛰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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