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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배/뉴스에세이'에 해당되는 글 67건

  1. 2008/08/20 3S정책이 부활한다고요? by '토씨' (55)
  2. 2008/08/20 당예서와 이대호, 그리고 MB의 올림픽 by '토씨' (8)
  3. 2008/08/15 방치된 '남북 공동응원 열차'를 보며 by '토씨' (4)
  4. 2008/07/31 검사님들, 언론은 '파수견'입니다 by '토씨' (41)
  5. 2008/07/22 조중동의 방송·포털 공격은 '영토전' by '토씨' (22)
  6. 2008/07/18 MB는 '청타'와 '대자보'를 알까? by '토씨' (17)
  7. 2008/07/18 금배지 여러분, '이건희판결' 어떤가요 by '토씨' (7)
  8. 2008/07/15 북한·일본에 뺨 맞은 MB독트린 by '토씨' (231)
  9. 2008/07/04 개헌론에 숨겨진 함정과 비수 by '토씨' (12)
  10. 2008/06/27 고시 이후? <조선> <한겨레>를 보라 by '토씨' (21)

1.
3S정책이 부활하는 걸까요?

많은 이들이 그렇게 우려합니다. 올림픽 때문에 중요한 이슈가 묻히고 있고,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특별한 계기 없이 상승하고 있다며 그렇게 간주합니다. 

청와대가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거리행진에 이명박 대통령이 동참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리는 터이니 우려는 더욱 짙어집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정부가 올림픽 덕을 보려는 의도가 없다고 단정할 근거는 찾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너무 일방적입니다. 이런 우려는 국민을 우민으로 전제한 것입니다. 3S가 국민을 우민으로 만든다는 논리에는 국민이 3S에 놀아날 만큼 충분히 어리석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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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정부가 3S정책을 펴는 것과 그 정책이 먹혀드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단순히 정치학 원론에 기대어 부동의를 표하는 게 아닙니다. 경험이 있습니다. 3S정책의 전성기였던 5공 시절의 경험이 있습니다.

몰두했던 게 사실입니다. 프로야구에 열광했고 흑백에서 칼라로 변한 ‘바보상자’를 탐닉했던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뇌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정치사회적 현안을 외면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6월 항쟁을 전개했습니다. 그로 인해 서울올림픽에 깔린 음험한 정치적 의도를 걷어냈습니다. 서울올림픽을 순수한 스포츠 제전으로 치르도록 만들었습니다. 국민이 그랬습니다.

이 한 예로 부족하다면 이런 사례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85년 2.12총선이 있었습니다. 5공의 철권통치와 함께 3S정책이 만개하던 때에 치러진 총선이었습니다. 이 총선에서 국민은 이른바 ‘정통 야당세력’을 복원시켰습니다. 더불어 86년 개헌투쟁과 87년 6월항쟁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3S정책과는 다른 경우이지만 이런 사례도 있습니다.

2002년, 온 국민이 월드컵에 붉게 물들었을 때 미선이와 효순이가 죽었습니다. 두 어린 생명의 죽음은 철저하게 묻혔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어느 한 신문의 제2사회면 구석에 1단 기사로 짧게 처리된 게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살아났습니다. 월드컵의 감동이 가시고 일상이 전개됨과 동시에 미선이와 효순이는 전 국민의 애도 대상이 됐고 대선의 핵심 이슈로 부상했습니다.

3.
‘일탈’이라고 해석합니다. 베이징 올림픽에 몰두하는 현상의 기저에는 일상탈출 심리가 깔려있다고 읽습니다.

무엇 하나 바뀌는 게 없는 갑갑한 일상,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답답한 현실로부터 탈출해 삶에 환풍 효과를 주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일종의 심리적 여행이라고 받아들입니다.

뭐라 할 수가 없습니다. 지치면 쉬어야 합니다. 잠시 짜증나는 일상을 잊고 대리만족의 쾌감을 맛볼 기회를 갖고자 하는 건 너무나 소박한 바람입니다.

여행은 이주가 아닙니다. 복귀를 약속한 떠남이지요.

4.
거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배영 선수에게 애정과 격려를 보내는 국민을 보면서 성숙된 민도를 발견합니다. 장미란 선수의 금메달과 세계신기록 못잖게 그녀가 겪은 인간적 고뇌에 천착하는 국민을 보면서 진지한 민도를 확인합니다. 그것은 결과보다는 과정을, 성과보다는 자세를 중시하는 민도입니다.

민도는 조금씩 축적되고 언젠가는 발산됩니다. 이배영 선수를 향한 시선, 장미란 선수를 향한 눈길은 이식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과정에서 조금씩 진화하고 발전하고 성숙된 것입니다. 그래서 별개일 수가 없습니다. 이 민도가 유독 스포츠에서만 발산되고 다른 정치사회적 현안에 대해선 사그러진다고 볼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올림픽에서 나타난 열광의 기운이, 따스하면서도 이성적인 시선은 어디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에너지는 보존되는 게 자연의 법칙이니까요.

▲사진=지난 9일 여자 핸드볼팀의 경기를 관람하는 이명박 대통령 부부.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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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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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준결승전에, 그리고 동메달 결정전에 임하는 당예서 선수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저 선수의 심정은 어떨까?’

당예서는 모국을 등지고 귀화한 선수입니다. 경쟁자들에 밀려 국가대표가 되지 못하고, 필생의 목표인 올림픽 메달을 딸 기회를 얻지 못한 게 한이 돼 한국으로 귀화한 선수입니다.

그런 선수가 모국에서 올림픽 메달에 도전했습니다. 모국 관중들의 야유를 받은 일도 있습니다.

어땠을까요? 당예서 선수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당예서 선수가 어제 탁구 여자 단체전 동메달을 딴 직후에 눈물을 훔치며 말했습니다.

“올림픽 메달을 따서 너무 기분이 좋다.”

2.
이진영 선수가 전했더군요. 올림픽 야구 미국전이 열리기 전의 상황이었습니다.

“(송)승준이가 갑자기 대기타석에 나서던 (이)대호를 부르더니 이렇게 외쳤다. ‘너 군대 갈래 안타 칠래. 둘 중 하나 골라.’ (이)대호는 대답 없이 조용히 타석에 들어서더니 큼지막한 홈런을 때려버렸다.”

이대호 선수가 미국전에서 장쾌한 투런포를 작렬시킨 동기가 ‘군대 가기 싫어서’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알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운동을 하는 선수에게 입대는 치명적입니다. 특히 ‘한철 장사’를 해야 하는 프로 선수에겐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프로 선수가 연루된 병역 비리가 종종 발생했습니다.

(프로)운동선수에게 입대는 실존의 문제이자 생존의 문제입니다.

3.
비록 일부의 사례에 불과하고 하나의 조각에 불과하지만 감히 해석하려고 합니다.

당예서 선수에게서 제2의 조국인 한국에 메달을 안겨줘야 한다는 ‘사명감’을 읽지 못했습니다. 송승준 선수의 ‘진한 농담’에서 ‘조국애’ 이전에 ‘생존논리’를 읽었습니다.

두 선수를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아니 정반대로 두 선수를 두둔하려고 합니다.

운동선수로서 최고의 무대인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목에 걸고자 하는 건 너무나 소박하고 너무나 절절한 소망입니다. 프로 선수로서 올림픽 메달을 따려는 건 선수 생명을 지속시키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입니다.

4.
‘개인적인’ 소망이 투지를 낳는 첫 번째 동인이라고 감히 말하는 근거는 두 선수 외에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많은 나라가 올림픽 메달을 따낸 선수들에게 억대의 포상금을 줍니다. 동기 유발 차원입니다.

중국의 탁구 선수들이 이 나라 저 나라로 귀화한 일도 있습니다. 나라 이름은 중국이 아닌데 출전 선수는 중국인인 경우를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했습니다.

똑 같은 경우로, 한국의 양궁 선수가 국내의 벽을 넘지 못해 일본으로 귀화한 일도 있습니다. 이 선수 또한 올림픽 출전이 소망이었습니다.

5.
물론 이분법은 위험한 논리입니다. 운동선수의 ‘개인적인 소망’과 ‘조국애’를 나누는 건 작위적입니다. 그래서 어색합니다.

2002년 월드컵 미국전에서 골을 넣은 안정환 선수가 ‘오노 세레머니’를 펼친 적이 있습니다. 야구 대표선수들이 ‘독도 도발 일본’을 꼭 이겨야 한다고 다짐했다는 후문도 들립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국가대표는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출전합니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조국에 대한 애정과 긍지를 안고 경기에 임하는 건 자랑스럽고 대견한 일입니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합니다. 갖다 붙이지 말았으면 합니다.

한 언론이 비아냥댔더군요. 여자 역도에서 금메달을 딴 북한의 박현숙 선수가 “장군님 생각에 기쁨과 영광이 솟구친다”고 말한 것을 두고 ‘장군님’이 지원이나 제대로 해줬는지 모르겠다고 비꼬았더군요.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랬습니다. 5공 시절에 국제 대회에 나가 금메달을 따면 어김없이 전두환 씨가 경기장에 전화를 걸었고 선수는 ‘대통령 각하’의 관심과 애정에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지금은 많이 가셨습니다. 그 시절처럼 호들갑은 떨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고생하며 자신을 뒷바라지 해온 ‘엄마’를 그리며 눈물을 훔치고 포상금으로 ‘엄마’ 호강시켜 주겠다고 다짐하는 게 요즘의 풍경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대통령 각하’ 개인의 이벤트로 활용하려는 시도는 많이 가셨지만 ‘국위’ ‘국력’과 연결하려는 시도는 아직도 엄연히 살아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그랬더군요. 지난 10일 박태환 선수가 남자 수영 400m에서 금메달을 따자 “박 선수 같은 세계적 선수가 나온 것은 우리의 국력이 그만큼 신장된 증거”라고 환호했다더군요.

수영연맹 회장을 16년간이나 하면서도 올림픽 금메달을 한 개도 따지 못한 경험이 있는 이 대통령이니까 개인적 소회가 남달랐으리라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겁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국력’을 읊조리기엔 우리 엘리트 스포츠의 그늘이 너무 짙습니다. 선수가 없어서 은퇴 선언을 했던 선수까지 설득해 올림픽에 출전시키는 게 작금의 한국 스포츠입니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국력’과 ‘국위’를 외칠 때 학교장과 학교법인 이사장은 ‘학교의 명예’를 앞세웁니다. 그렇게 우승을 강조하고 선수를 혹사합니다. 그 탓에 어린 선수들은 학업과 담을 쌓고 지내다가 운동 경쟁에서 탈락하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교문마저 등집니다. 이런 현실이 싫어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려고 했지만 주위 환경이 허락지 않아 미국 유학길에 오른 여자 수영선수도 있습니다.

이게 작금의 한국 스포츠입니다. 메달에 목을 거는 엘리트 스포츠의 기반인 학원 스포츠의 엄연한 현실입니다.

▲사진 출처=청와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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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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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갑습니다.

베이징 하늘 아래에 한반도기가 등장했습니다. 북한 유도의 간판 계순희 선수가 경기를 치르던 지난 11일, 남북 응원단이 같이 한반도기를 흔들었습니다.

하루 뒤, 이번엔 톈진에서 한반도기가 펄럭였습니다. 독일과 경기를 치르는 북한 여자 축구대표팀을 응원하기 위해 하얀 바탕에 한반도 지도가 푸르게 새겨진 한반도기가 출렁였습니다.

2.
아쉽습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남과 북의 선수들이 경기를 치르는 경기장이 한두 군데가 아니고 경기 종목이 한두 개가 아닌데도 한반도기는 더 이상 펄럭이지 않습니다.

빨간 옷을 맞춰 입은 남측 응원단이 ‘대∼한민국’을 연호하고, 역시 빨간 옷과 빨간 모자로 통일한 북측 응원단이 ‘이겨라’를 합창합니다. 따로 그렇게 외칩니다.

3.
격세지감을 느끼기엔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북측의 응원단에 열광하던 모습,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에서 아리랑 응원단이 어깨동무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남북 선수들이 손에 손잡고 공동입장하던 감동도 아직 가시지 않았습니다.

기대도 컸습니다.

지난해 10월 4일, 남과 북의 정상이 베이징 올림픽 공동응원 열차를 운행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의 흥분과 기대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부산을 출발해 휴전선을 넘어 평양과 신의주를 지나 만주벌판을 달리는 기차 여정에 자못 큰 기대를 품었습니다. 남과 북의 응원단이 삶은계란과 사이다를 나눠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장면을 상상하며 즐거워 했습니다.

지난 2월까지만 해도 살아있었습니다. 10.4정상선언의 합의가 살아있었습니다. 남북은 2월 4일 경의선 열차를 이용해 300명씩 두 차례에 나눠 600명의 공동응원단을 베이징에 보내기로 합의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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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제는 잊혀졌습니다.

어느 누구도 공동응원 열차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고 있는 이 때에, 개막식 공동입장마저 무산된 이 상황에 생뚱맞게 무슨 공동응원 열차냐는 핀잔을 들을까봐 오히려 경계합니다.

상황은 상전벽해입니다.

5.
두 개의 뉴스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사진 한 장이 실렸습니다. <영남일보>가 제공한 사진을 <경향신문>이 어제 실었습니다.

코레일이 남북 공동응원 열차로 쓰기 위해 70억원을 들여 개조한 관광열차가 경북 김천시 철도차량 전문제작업체 야적장에 방치된 사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아주 건조한 사진설명이 달렸습니다.

“열차는 무용지물이 됐다.”

지난 12일 권총 50m 금메달과 은메달을 나란히 차지한 남측의 진종오 선수와 북측의 김정수 선수에게 미국 기자가 물었습니다. “런던 올림픽에서는 남북이 공동 입장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두 선수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그건 정부가 할 일이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사진 위 = 2003년 8월 24일 오후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 북한 대 프랑스 여자 축구 경기에서 아리랑 응원단이 공동응원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사진 아래 = 경북 김천시 철도차량 철도차량 전문제작업체 로윈사 야적장에 방치된 남북 공동응원 열차. ⓒ영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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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씨'


1.
언론은 ‘개’입니다. ‘파수견’이라고들 부르죠.

사명은 짖는 것입니다. 어둠을 가르는 발소리가 심상치 않으면 무조건 짖어야 합니다. 발소리의 주인공이 도둑이든 방문객이든 무조건 짖어야 합니다. 그렇게 짖어서 주인을 깨워야 합니다. 물론 그 다음 일은 집 주인이 알아서 할 일이죠.

언론과 비슷한 존재가 있습니다. 의사입니다. ‘파수견’에 빗대자면 ‘안내견’ 쯤 되는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이 진찰을 요청합니다. 연신 기침을 해대는 사람입니다. 정확한 병명은 정밀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의사는 당장 주의를 줍니다. 병명이 감기인지, 폐렴인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담배를 피우지 말고 찬바람 맞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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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구도 욕하지 않습니다.

집 주인이 촛불을 들고 살펴보니 도둑이 아니라 방문객이었다고 해서 개를 개 패듯 하지는 않습니다. 짖는 소리가 컸다고, 너무 자주 짖었다고 발로 차지 않습니다. 파수견은 파수견으로서의 역할을 다 한 것입니다. 그런 파수견을 패면, 그래서 다시는 짖지 않으면 나중에 도둑이 들었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사에게 삿대질을 하지 않습니다. 정밀검사 결과 폐렴도, 감기도 아니고 단지 사레 들린 것으로 판명났다고 해서 왜 담배를 못 피우게 했냐고 따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의사로선 상대방이 최적의 환경에서 건강을 챙길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런 의사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 건강 예방법은 들을 수 없습니다.

3.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IMF의 악몽입니다.

IMF 환란이 터진 직후 종합지의 한 경제 기자가 신문지면에 ‘반성문’을 실었습니다. ‘펀더멘탈은 튼튼하다’는 정부 말만 믿고 정부 정책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데 소홀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IMF 환란을 막지 못했다고 반성했습니다.

상상을 해 봅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져봅니다.

만약 이 기자가 감시와 견제 역할을 충실히 했다면, 그런데도 IMF 환란이 터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이 기자는 혹세무민하는 기자가 됐을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기자가 당시 충분한 경제 데이터를 갖고 분석하고 해석해서 판단을 내리고 그래서 경보음을 울렸다면 결과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가 정당성을 갖는다고 믿습니다. 바로 그게 ‘파수견’의 역할이라고 확신합니다.

4.
맥은 모두 같습니다. ‘파수견’이나 ‘안내견’이나 경제 기자나 모두가 ‘가능성’의 영역에서 논해지는 존재들입니다. ‘만에 하나’의 상황에 대비하고 ‘합리적 의심’에 기초해 경종을 울리고 예방을 해야 한다는 명제, 이 명제 위에서 비교되고 교차되는 존재들입니다.

‘PD수첩’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 즉 미국 쇠고기가 한국민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제기한 것입니다.

주관적으로, 일방적으로 지어낸 가능성이 아닙니다. 세계적으로 공론화됐고 당시도, 지금도 논의와 연구가 진행 중인 가능성을 제기한 것입니다. 더불어 졸속협상으로 그 가능성이 ‘만에 하나’에서 ‘만에 둘’로 확대될 또 다른 가능성을 경계한 것입니다.

5.
이런 ‘PD수첩’을 단죄하려고 합니다. 검찰이 나서서 기소를 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가당치가 않습니다. 검찰의 사실상의 중간 수사결과 발표, 140쪽에 이르는 공개질의는 가당치가 않습니다.

검찰의 행태가 가당하려면,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PD수첩’의 보도내용이 ‘조작’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검찰이 주장한 ‘왜곡’ ‘과장’에 의도성을 얹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다우너 소는 ‘절대’ 광우병과는 상관없다는 사실, 크로이츠펠트 야콥병(CJD)과 변형 크로이츠펠트 야콥병(vCJD)은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인의 MM형 유전자와 광우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확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정반대의 입장에서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제기한 ‘PD수첩’의 보도내용은 ‘조작’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사실이 그렇지가 않다면 검찰의 으름장은 ‘파수견’을 개 패듯 패고 ‘안내견’에 삿대질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6.
아, 한 가지 사실을 덧붙여야 겠네요. 경제 기자 얘기가 나왔으니까 추가하는 겁니다.

IMF 당시 경제를 총괄했던 사람은 강경식 경제부총리였습니다. 이 사람이 기소됐습니다. 환란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직무유기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판결은 무죄로 나왔습니다. 법원은 정상적인 직무범위 안에서의 정책 판단에 대해서는 죄를 물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수백 만 명의 직장인을 거리로 내몰고 수많은 가족공동체를 파탄 냈던 IMF 환란의 당사자에게 내린 판결이 이랬습니다. 고의로 환란을 유도한 게 아니라 단순한 판단 착오로 인한 것이었다면 정상적인 업무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포인트는 ‘판단’입니다. 수집된 자료를 분석하고 해석해서 내린 판단에 법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다는 게 당시 법원의 판결 취지입니다.

이 사실을 토대로 검찰에 꼭 묻고 싶네요.

판단의 자유를 구가하는 주체는 오직 정부 당국자여야 한다는 법은 설마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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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씨'


석 달 전입니다. 촛불이 켜지기 바로 직전의 상황입니다.

‘PD수첩’이 4월 29일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를 방송합니다. 이 방송을 기점으로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자 조중동이 반박에 나섭니다. 이른바 ‘인터넷 괴담’과 ‘PD수첩’ 내용을 한 데 묶어 ‘혹세무민’으로 몰아갑니다. 효과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역효과가 났지요. 조중동의 논조에 반발한 네티즌이 조중동 광고주 불매운동에 나섭니다.

석 달 전의 상황, 그리고 석 달 동안의 흐름을 갖고 살필 수 있습니다. 조중동이 방송과 포털 때리기에 골몰하는 이유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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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동으로선 감내하기 힘든 상처를 입었습니다. 바로 ‘자존’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自尊’입니다. 의제 설정력과 여론 지배력에서 월등히 앞선다는 자존감에 씻을 수 없는 생채기가 났습니다. 조중동이 연합을 해서 한 목소리를 냈는데도 여론을 이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여론의 질타를 받았지요. 무력감에 빠질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自存’입니다. 당장의 광고 감소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장래의 일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위축되는 신문시장인데 여기에 ‘반 조중동’ 정서까지 급속히 번지면 경영기반이 위축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위기감에 휩싸일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새삼스레 복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면적 분석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단순히 정치공세로 파악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정국을 반전시키기 위해, 이명박 정부의 여론장악을 돕기 위해 조중동이 발 벗고 나선 것으로 분석하는 건 피상적입니다.

다른 요인을 마저 살펴야 합니다. 정치적 측면 이외의 요소, 즉 경제적 측면입니다.

조중동의 방송·포털 때리기는 영토 수호 전쟁입니다. 영토 확장을 위한 정벌전이기도 합니다.

상황이 그렇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매체 영향력 순위에서 조중동은 뒤로 밀렸습니다. 1위 자리는 늘 방송사에게 넘겨줬습니다. 뉴스 콘텐츠 전달 창구의 주도권은 포털에 빼앗겼습니다.

‘올드 신문’이 설 자리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속보성을 생명으로 하는 스트레이트 영역에서 ‘올드 신문’은 더 이상 경쟁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초간지’가 활개 치는 곳에서 ‘일간지’는 명함을 내밀기도 쉽지 않습니다.

발굴 특종으로 경쟁력을 높이는 방법이 있지만 이건 한계가 뚜렷합니다. 금맥 캐기와 비슷한 일이니까 효용성이 떨어집니다.

승부수를 던져야 하는 분야는 ‘편집’ 부문입니다. 스트레이트 기사를 재료로 해서 의제화를 시도하는 것이죠. 이러려면 시각과 입장이 담보돼야 합니다. 언론이 아닌 포털은 범접하기 힘들고 중립을 지켜야 하는 방송은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올드 신문’이 독점해오다시피 했고 바로 이 덕에 시장 위축에도 불구하고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헌데 탈이 났습니다. 포털 토론방이 등장했고 방송 시사프로그램이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토론방이 의제화에 선수를 쳤을 뿐만 아니라 조중동이 설정하는 의제를 중화시켰습니다. 시사프로그램이 탁월한 전파력을 앞세워 분석과 해설과 입장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전달’했습니다.

여기서 살필 수 있습니다. 방송 공격을 ‘PD수첩’에 집중하고, 포털 비판을 ‘아고라’에 맞추는 이유를 살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리이기 때문입니다. ‘PD수첩’을 눌러놔야 시사프로그램이 위축됩니다. ‘아고라’를 낚아채야 포털을 단순 전달자로 묶을 수 있습니다.

이건 당장의 목표입니다. 이번 싸움에서 손에 넣어야 하는 전리품입니다.

이것 말고 하나 더 있습니다. 지형의 변화입니다. 미디어 시장 전체에 큰 지각 변동이 올 수 있도록 판을 조성하는 근본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조중동은 방송 진출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지상파가 안 되면 케이블TV의 보도채널이나 종합편성채널에라도 진출하려고 합니다.

목표는 분명한데 여건이 녹록하지 않습니다.

비판 여론이 비등합니다. 조중동이 방송에까지 진출하면 여론 독과점 현상이 심화될 것이란 우려가 팽배합니다. 기반이 부실합니다. 방송에 진출한다고 해서 기존의 공룡 지상파의 공세를 이겨낸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정지작업은 필수입니다. 핵심은 신뢰입니다. 기존 지상파의 신뢰지수를 떨어뜨림으로써 자신들의 방송진입 반발 여론을 희석시켜야 합니다. 더불어 기존 지상파의 ‘편파성’을 부각함으로써 다른 ‘편파성’이 스며드는 것에 대한 견제 심리를 완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상파 진출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설령 지상파 진출이 안 된다 해도, 어쩔 수 없이 케이블이나 IPTV에 진출한다고 해도 그래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지상파의 ‘시사’ 영역을 위축시켜놔야 케이블이나 IPTV의 ‘시사’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포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참에 싹을 자르고 파이를 키워야 합니다.

조중동이 방송에 진출하는 순간 그들은 종합미디어그룹이 됩니다. 덩치가 커지는 것이죠. 덩치가 커지면 그만큼 지출이 늘고 또 그만큼 매출을 올려야 합니다.

관건은 광고입니다. 유료화가 요원하고, 그래서 광고 수입이 곧 컨텐츠 수입과 동의어로 통하는 우리 시장에서 파이를 키우는 방법은 상대의 파이를 줄이는 것입니다. 그 비결은 역시 신뢰입니다. 포털의 신뢰지수를 줄임으로써 광고주의 광고 집행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것입니다.

포털에 대한 입김을 강화하게 되면 부산물도 챙길 수 있습니다. ‘쥐꼬리’ 수준인 컨텐츠 판매료의 단가를 올릴 수 있습니다.

분명합니다. 조중동이 방송과, 포털과 싸워야 하는 이유는 아주 자명합니다. 정치와 이념을 떠나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방송과 포털을 제압해야 합니다.

조중동이 지금 벌이는 싸움은 ‘불퇴전의 투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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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씨'

1.
‘청타’를 기억하시나요? 파랑 먹지를 타자기에 끼운 뒤 한 글자 한 글자 치면 글자 부분만 구멍이 뚫리죠. 그 청타 먹지를 등사기에 놓고 밀면 유인물이 나왔습니다. 누런 갱지에 여기저기 잉크 자국이 번진 유인물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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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보’는 기억하실 겁니다. 커다란 전지에 검정 파랑 빨강 매직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건물 벽이나 큰 나무판에 붙이곤 했죠.

모두 전두환 시절의 얘기입니다. 언론이 죽어있던 5공 때의 얘기입니다.

2.
그 땐 진보 언론이니 보수 언론이니, 메이저 언론이니 마이너 언론이니 하는 구분법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언론이 ‘어용’ 또는 ‘관제’라는 이름으로 불렸죠.

방송은 ‘땡전 뉴스’로 넘쳐났고 신문엔 ‘보도지침’ 재갈이 물려 있었습니다. 방송은 9시 시보가 울리기가 무섭게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뉴스를 시작했습니다. 신문은 사진 한 장 싣는 일, 기사 크기 정하는 일조차 맘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전두환 정부의 통제와 간섭에 따라야 했습니다.

대체 미디어는 없었습니다. 인쇄소엔 형사가 수시로 들락거리며 ‘불온 문서’를 제작하는지를 사찰했고, 복사집엔 ‘불순한 전단’ 복사가 맡겨지면 신고하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청타’와 ‘대자보’는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알권리를 보장 받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알권리’를 충족해야 했고, 어느 곳에서도 표현물을 맘대로 제작할 수 없었기에 후미진 곳에서 몰래 타자기를 두드리고 등사기를 밀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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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뜬금없이 옛날이야기를 하느냐고요? 요즘 돌아가는 꼴이 옛날이야기를 반추하게 하네요.

이러다간 ‘씨’가 마를 것 같습니다. 방송은 국정홍보방송으로 전락할 것 같고, 신문은 ‘보수지 카르텔’ 체제로 회귀할 것 같고, 인터넷은 개점휴업 상태로 몰릴 것 같습니다.

돌아가는 사정이 그렇습니다. YTN엔 이미 ‘낙하산’이 투하됐습니다. 그 다음은 KBS겠죠. 인사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MBC엔 징계 칼끝이 겨눠져 있습니다.

신문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촛불’이 켜지기 전에 이미 문제가 됐죠? 정부 광고나 협찬이 차별적으로 집행된다는 지적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 여기에 공교롭게도 조중동 광고주 불매운동 공방 유탄이 이른바 ‘진보 언론’에까지 튀고 있습니다. 광고주가 몸을 사리면서 광고 집행을 아예 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도 어수선합니다. 방송통신심의위의 제재에 이어 이번에 문화체육관광부가 저작권법 개정안을 들고 나왔습니다. 불법 복제물을 카페나 블로그에 올린 네티즌을 포털이 제재하지 않으면 1000만 원의 과태료를 물리고, 과태료를 세 번 받으면 포털 폐쇄까지 가능하게 하는 개정안입니다. 이러면 네티즌의 ‘표현’은 위축됩니다. 정보 접근권이 취약한 네티즌이 기존 언론의 보도물 등에 근거해 입장을 밝히는 행위가 제한되고, 포털은 적극적 감시자로 변모하게 됩니다. 포털이 몸을 사리면 더불어 인터넷 언론도 위축될 겁니다.

4.
여기서 갈라야 겠네요.

과잉해석이 있고 과대망상이 있습니다.

‘씨’가 마를 것이란 전망은 사실 과잉해석입니다. 방송에 재갈이 물리고 신문이 한쪽으로 쏠리고 인터넷에 한파가 몰아닥쳐도 ‘씨’가 마르는 건 아닙니다. 그것 말고도 여러 개가 있습니다. 모바일이 있습니다. 복사수단은 널려있습니다. 전두환 시절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체 표현수단은 넘쳐납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씨’가 마를 것이라고 기대하는 건 과대망상입니다. 언론을 '어용' 또는 '관제'로 일색화했던 전두환 정권조차 민심을 잡지 못했습니다. 유인물이나 대자보에 의존했던 ‘저항의 목소리’는 지금의 광랜에 비견될 만큼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본질은 언론이 아니라 언로입니다. 언론을 단단히 틀어쥔다고 해서 시중의 언로까지 막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언론을 틀어쥐면 틀어쥘수록 언로는 다변화되고 팽창됩니다. 지금은 그럴 여건이 충분히 조성돼 있습니다.

역효과가 날 겁니다. 언론을 틀어쥘수록 언로를 통해 유포되고 확대되는 정보와 의견은 더욱 사나워질 겁니다. 언론이 ‘공정’ ‘객관’ ‘중립’의 룰에 묶여 최소한의 ‘사실보도’ 준칙을 지켜야 하는 반면에 언로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태도와 감정을 듬뿍 담아 ‘사실’과 ‘의견’을 혼합시키겠죠. 이러다 보면 이명박 정부가 그토록 경멸해마지 않는 ‘괴담’도 더욱 많이, 그리도 더 빠르게 전파될지 모릅니다.

교훈도 있습니다. 언론의 역할은 제한적입니다. 전두환 시절의 '어용'·'관제' 언론이 반증합니다. 아무리 정보를 정권 입맛에 맞게 골라 퍼뜨려도, 아무리 정부 입장에 서서 국민을 ‘계도’해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습니다. 민심이 정치적 태도를 정하는 데에 언론이 전달하는 정보, 언론이 제시하는 의견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중한 요인은 바로 생활입니다. 민심이 자기 삶을 꾸려나가면서 겪게 되는 정부 정책과 정부 태도를 보면서 정치적 태도를 정합니다.

5.
이명박 정부에게 묻고 싶습니다. 어느 게 득이 될까요? 옳고 그름을 떠나 이젠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실용’ 즉 효율과 효용만 갖고 따지죠. 어느 게 실용적일까요?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쓸데없는 짓입니다.

진리는 아주 간명한 모습을 띠고 나타납니다. 풍선을 누르면 다른 한쪽이 부풀어 오릅니다. 이건 진리입니다. 약이 입에 쓰다고 내치면 합병증에 걸리는 것. 이것 또한 진리입니다.

하나 더 말할까요? 소탐대실은 동서고금이 인정하는 진리입니다.

▲사진 위 = 대자보는 아직도 살아있다. 얼마 전 고려대에 게시된 ‘폴리페서’ 관련 대자보 ⓒ여성신문
▲사진 아래 = '낙하산‘ 사장에 반대하는 YTN 사원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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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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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두는 개헌입니다. 제헌절 60주년을 맞아 정치권이 내놓은 화두는 개헌입니다. 여야 가리지 않고 모두가 개헌을 읊조립니다.

익히 들어온 화두이니까 긴 설명은 필요 없을 겁니다. 여야 모두 ‘87년 체제’의 극복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타당한 주장이니까 토를 달 필요까진 없을 겁니다. 87년 이후 20년 동안 한국 사회가 빠르게, 그리고 폭넓게 변한 사실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정보혁명이 이뤄지고 개인의 삶이 더더욱 중시되는 사회로 변모한 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바뀌어야 겠죠. 몸뚱이가 커졌으니 옷을 갈아입어야 되겠죠.

근데 왜일까요? 흔쾌히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87년 체제’의 극복이란 말에 어두운 여운이 느껴집니다.

2.
어제 두 건의 뉴스를 접했습니다. 아주 묘하게 교차하는 뉴스였습니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옅은 미소를 띠며 법정을 나서는 장면과 이석연 법제처장의 소신에 찬 강연 소식이 기묘하게 오버랩 됐습니다.

법원이 판결했습니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은 ‘무죄’,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 헐값 발행은 ‘면소’라고 했습니다. 조세 포탈, 그것도 ‘일부’ 시기의 조세 포탈만 인정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습니다.

이석연 법제처장이 주장했습니다. “현행 헌법에는 자유시장경제라는 헌법의 기본원리를 제약하는 규정이 있다”며 “개헌과정에서 국가의 경제 관여를 규정한 조항을 손질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헌법 119조 2항 ‘경제민주화’ 조항입니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수 있다’는 바로 그 조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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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흐름은 하나입니다. 두 건의 뉴스를 관통하는 흐름은 ‘경제 민주화’ 조항에 대한 부정, 또는 역행입니다.

물론 좁게 보면 헌법이 아닌 법률 해석의 문제일 수도 있겠죠. 법원 판결의 경우 ‘경제 민주화’ 취지와는 무관하게 법률 요건에 맞는지만 따진, 실무적 판결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형식논리입니다. 법원 판결 이후 불붙고 있는 논란은 재판부의 적극적인 법률 해석·적용 의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확장하면 헌법에 명시된 ‘경제 민주화’ 취지에 입각했느냐의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4.
옳고 그름을 여기서 따지지는 않겠습니다. 찬반을 가르지도 않겠습니다. 대신 개헌을 읊조리는 정치권에 질문을 던지려 합니다.

어떻게 보는지요? ’87년 체제‘ 20년 동안 ’경제 민주화‘는 ’성장‘했을까요? 아니면 ’퇴보‘했을까요? 법원의 ‘이건희 판결’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요?

87년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재벌 총수의 재판 회부 사실만으로도 ‘성장’한 것이라고 봐야 할까요? 아니면 재판에 회부된 재벌 총수 대부분이 집행유예를 선고받는 현실에서 ‘퇴보’ 또는 ‘답보’의 근거를 찾아야 할까요?

아니, 질문이 잘못됐네요. 논란이 되는 문제는 ‘경제 민주화’의 정도가 아니라 ‘경제 민주화’ 조항의 정당성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물어야 겠죠.

재벌 총수를 배임이나 조세 포탈 등의 이유로 법정에 세우는 게 자유시장경제 원리에 반하는 걸까요? 아니면 ‘자유’가 ‘약탈’이나 '지배'로 흐르는 걸 막기 위한 ‘불가피한 관여’일까요?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어찌보면 권력구조개편 문제보다 더 중요한, 우리 경제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기 때문에 반드시 듣고 싶습니다. ‘경제 민주화’에 대한 정치권의 입장을 듣고 싶고, 개헌에 그 문제를 포함시킬 것인지 여부를 듣고 싶습니다.

그래야 정치권이 합창하는 개헌의 필요성에 대해 제대로 판단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진 위 = 국회의사당 전경 ⓒ국회
▲사진 아래 = 판결을 받고 법정을 나서는 이건희 전 삼성 회장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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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씨'


1.
MB독트린이란 게 있습니다. 우리 외교의 7대 과제와 원칙을 정리한 것입니다. 핵심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한미동맹의 강화와 비핵·개방3000, 그리고 아시아 외교 확대입니다.

그대로 추진해 왔습니다. 한미동맹을 전략적 동맹으로 한 차원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해왔고, 당근을  줄테니 핵을 포기하라고 북한을 압박했습니다. 아시아 외교를 확대하기 위해 일본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고요.

그 MB독트린이 사실상의 파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지 다섯 달도 채 되지 않아 MB독트린이 사방에 갇히는 처지에 빠져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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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휴전선에 냉기가 감돌고 있습니다. 무고한 남측 민간인 관광객이 북측 초병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습니다. 사과를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사과를 하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개방은커녕 기존의 교류마저 중단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현해탄에도 한류가 밀려들고 있습니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중학교 신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을 명기하려 하고 청와대는 단호한 대처를 다짐하고 있습니다. ‘원만한’ 타협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졌습니다.

MB독트린의 현황이 이렇습니다. 위에서 찍어누르고 밑에서 치받고 있습니다.

그럼 좌우는 어떨까요? 역시 녹록치 않습니다.

중국은 뿔이 나 있습니다. 한국 정부의 한미동맹 강화 움직임에 외교부 대변인이 직접 나서서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습니다. 다른 날도 아니고 이명박 대통령이 자기 나라를 방문하고 있던 때에 그렇게 했습니다. 반대로 북한에 대해서는 시진핑 국가 부주석을 보내고 식량지원과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다른 곳을 쳐다봅니다. 북한에 잇따라 유화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핵 신고서 제출 후 검증절차를 개시하기만 하면 8월 11일을 기점으로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해줄 계획입니다. 식량 50만t 지원을 약속했고 이미 1차 지원분을 보냈습니다.

현실이 이렇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꿈은 일장춘몽이 돼 가고 있습니다. MB독트린으로 한국을 사통팔달의 요충지로 삼으려던 계획은 사면초가의 외톨이 신세를 자초하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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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떻게 된 걸까요?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걸까요?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기과신·자기중심의 사고가 패착을 불렀습니다.

외교는 상대가 있는 게임입니다. 따라서 외교 전략은 ‘희망’이 아니라 ‘계산’이어야 합니다. 상대의 외교전략을 낳는 요인을 두루 살펴 현실 가능한 목표와 전략을 짜야 합니다. 이건 외교 문외한도 말할 수 있는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MB독트린은 이 ‘기본’을 경시했습니다.

체제의 흥망을 핵에 걸고 있는 북한에게 ‘핵을 포기하면 당근 줄께’라고 말하는 건 애당초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당근이 아니라 당근 밭을 통째로 내줘도 될까 말까 한 상황에 ‘국민소득 3000달러’를 운운했고 그 결과 ‘참을 수 없는 모독’이란 험한 대답만 들어야 했습니다.

일본이 독도를 깨끗이 포기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무망한 일이었습니다. 보수주의가 넘실대는 일본 정계의 생리상, 그런 일본 정계의 보수주의를 돌파할 양심세력이 위축될대로 위축된 현실상 독도는 언제라도 재등장할 폭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아량’을 보이고 ‘관용’을 보이면 문제가 없을 것처럼 낙관했습니다.

중국의 민감 부위를 살피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호주와 일본을 축으로 하는 ‘대양동맹’을 구축해 중국을 봉쇄하려 하는 데 대해 중국이 얼마나 민감해 하는지,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한미동맹 격상을, 그것도 군사적인 동맹 강화를 추진하려는 데 대해 얼마나 예민해 하는지 세심하게 살피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북핵 해결 이후 전략을 꼼꼼히 둘러보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북핵 해결 대가로 뭘 내놓을지, 그러면 북한의 처지와 북미관계가 어떻게 바뀔지를 주의 깊게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북미관계가 급진전되면 북한의 대남 효용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만 잘 하면, 이명박 정부가 원칙을 갖고 나가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4.
그 결과가 바로 '오늘'입니다.

북한은 남북관계가 경색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고한 민간인에 총격을 가했습니다. 그래서 대남 관계가 얼어붙어도 미국으로부터, 중국으로부터 식량이 지원되고 달러화와 위안화가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한국 정부의 반발에 신경쓰지 않고 ‘다케시마’를 다시 읊조립니다. 그래서 대한관계가 냉랭해져도 미국·호주와의 동맹관계만 잘 유지하면 정치·국제적 타격은 별로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명박 정부는 할 게 없습니다. 북한을 향해 강경책을 써봤자 효과가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개성·금강산 사업을 포함한 대북교류사업을 전면 중단한다 해도 북한은 크게 아쉬울 게 없습니다. 중국이 등을 토닥거리고 미국이 웃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을 향해 단호히 대처해도 효과가 없습니다. 주일대사 소환과 같은 초강경 외교책을 써봤자 일본이 크게 타격받을 게 없습니다. '중립‘을 견지하는 맹방 미국이 있는 한 오히려 득이 됩니다. 독도문제를 국제 분쟁화 하면 일본은 오히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가는 겁니다.

둘러보니 그렇군요. MB독트린은 사방에 갇힌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우물 안에 빠져있었습니다. 자기가 올려다보는 하늘이 중천인 줄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5.
이제라도 새로 짜야 합니다. 동북아 현실과 정세를 냉정하게 살피고 자신을 겸허하게 돌아본 다음에 짜야 합니다.

복잡다단한 현실을 정밀하게 스케치하는 게 필요합니다. 멀찌감치 서서 크로키를 할 게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 세밀 묘사를 해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가 지금 당장 그려야 하는 그림은 추상화가 아니라 구상화입니다.

▲사진 = “한국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는 다케시마”라고 기술한 2006년판 일본 공민교과서(위), 동해선 출입사무소 앞에서 금강산 피격사망사건을 취재하고 있는 기자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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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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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촛불정국 두 달을 지내면서 생각했습니다. 아니, 대선 이후 반 년 넘게 생각했습니다.

'대통령 중임제였다면 이명박 대통령이 저렇게 밀어붙였을까?'
'이원집정부제였다면 국정이 저렇게 한쪽으로 쏠렸을까?'
'내각제였다면 촛불이 두 달 넘게 거리에 머물렀을까?'

아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국정 스타일과 국민 참여가 이렇게까지 경직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등을 밀더군요. 여기저기서 고개를 드는 개헌론에 눈길을 주게 만들더군요.

‘그래, 이제 개헌을 할 때가 된 거야.’

2.

근데 이게 웬일입니까?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글 몇 편이 성큼 다가오더군요.

김성호 연세대 교수가 어제 <동아일보>에 칼럼을 실었습니다. 제헌 60주년을 맞아 개헌을 생각하는 글이었습니다.

이 글에서 김 교수가 질타하더군요. “변하는 것이 있으면 불변하는 것도 있어야 한다”며 “급진적인 신자유주의 개헌을 어찌 그리 쉽게 말하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습니다. “개헌 논의를 선도하는 보수”를 향한 비판이었습니다. 건국헌법에 반영된 ‘삼균주의’를 불변의 가치로 전제해 놓고 보수의 ‘방임적 자유시장주의’를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 “(건국헌법의 창조적 재해석이) 없이 세계와 시장과 실용만을 되뇔 때 ‘대한민국’은 가고 ‘보수’만 남는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