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87년 7월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6월의 긴긴 함성이 끝나고 난 직후입니다.
부산행 고속버스에 올랐습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핑계 삼아 짐을 꾸렸습니다. 바람을 쐬고 싶었습니다. 아리따운 아가씨가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을 꿈꾸면서 고속버스에 올랐습니다.
짧은 머리에 검게 그을린 피부의 청년이 앉아있더군요.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었습니다. 군인 아니면 전경이었습니다.
“……”
“……”
저와 그 청년이 말을 섞은 건 고속버스가 휴게소를 벗어난 직후입니다. 그 청년이 음료수를 건네더군요.
“저 혹시 대학생인가요?”
“네.…”
“혹시 어느 대학교인지…”
“○○대입니다.”
눈이 동그래지더군요. 그러면서 외마디 말을 토해냈습니다.
“제가 ○○대 정문 앞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대화, 아니 설전이 시작됐습니다. 왜 ‘짱돌’에 ‘(화)염병’을 던지냐고 하더군요. 저도 되물었습니다. 왜 최루탄에 ‘지랄탄’까지 쏘냐고 했습니다.
목소리가 컸나 봅니다. 앞뒤, 그리고 옆자리의 승객들이 호기심 반 짜증 반으로 저희들을 지켜보더군요.
설전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말을 돌렸습니다. ‘주장’에서 ‘경험’으로, ‘입장’에서 ‘무용담’으로 화제를 돌렸습니다.
교차했습니다. 그 청년의 경험과 제 경험이 명징하게 대비됐습니다.
그 청년은 자기 동료가 병원에 누워있다고 했습니다. ○○대 학생들이 던진 ‘염병’이 투구에 맞아 깨지면서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저도 말했습니다. 내 후배도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습니다. 전경들이 쏜 직격탄을 맞고 두개골이 함몰돼 중환자실에 있다가 이제 겨우 일반병동으로 옮겨졌다고 했습니다.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습니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흐른 다음에 서로 악수를 하며 헤어졌습니다. 몸조심하라는 당부의 말과 함께 고속버스 터미널을 빠져나갔습니다.
2.
20년 후로 돌아와 주위를 둘러봅니다.
촛불시위에 참여했던 50대 남성의 손가락이 절단됩니다. 촛불시위를 진압했던 전경이 기절해 동료 등에 업혀갑니다. 방패에 찍힌 시민의 얼굴이 피범벅이 됩니다. 시위대에 멱살 잡힌 전경이 길바닥에 쓰러집니다.
심지어 정치권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연출됩니다. 안민석 민주당 의원은 전경에 집단 폭행당했다고 주장하고 경찰과 한나라당은 안민석 의원이 기동대장의 턱뼈를 나가게 했다고 주장합니다.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크게 다를 바는 없습니다. 20년 전이나 20년 후나 팽팽히 대립하고 끝없이 입씨름을 합니다.
3.
욕먹을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양쪽 모두로부터 지탄 받을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발단을 제공한 쪽이 있는데 왜 싸잡아 양비론을 펴느냐고 뭇매를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하렵니다.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하렵니다.
그건 불행이라고, 서로에게 상처가 될 뿐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하지 않으렵니다. 너무 보편타당한 얘기니까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20년 전의 일을 반추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콕 찍어 말하렵니다. 촛불을 든 시민을 향해 말하렵니다.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하렵니다.
촛불시민이 잘못 했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전경을 두둔하려고 하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전경들에겐 자율성이 없습니다. 그들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존재입니다. 이런 전경들에게 자율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건 옳을지는 몰라도 현실적이지는 않습니다.
오늘 뉴스가 나왔습니다. 경찰이 물대포에 최루액을 섞기로 했답니다. 전경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경찰 지휘부는 그렇게 작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눈에 선합니다. 아마 더 강렬하게 자극할 겁니다.
4.
최루탄 가루를 뒤집어써본 사람은 잊지 않습니다. 최루가스가 눈에 핏발을 서게 하고 눈물 콧물이 뒤범벅 되게 만들고 아스팔트 위에 구토를 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끔찍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노란 위액을 토해내면서 더불어 속이 뒤집히고 뒤집힌 속이 분기를 팽창시킨다는 사실도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경찰이 최루액 섞인 물대포를 쏘는 순간 이 끔찍한 경험이 다시 현실이 될지 모릅니다. 눈에 핏발이 서고 속이 뒤집힌 시민 일부가 ‘짱돌’을 들고 각목을 들지 모릅니다.
이해합니다. 고통에 약합니다. 순간의 분기를 억누르기 힘듭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들이 내보이는 일반적인 반사현상입니다.
이해하지만 옹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촛불이 꺼집니다. 촛불이 꺼진 그 자리에 ‘극렬 좌파’ ‘반미 프로’를 규탄하는 선무 방송차량이 맴돌 것입니다. 색깔 공세를 더 강화하겠죠.
고통스럽더라도 참아내야 합니다. 눈물 콧물이 흐르면 팔로 훔쳐내고 눈에 핏발이 서면 질끈 감고 속이 메스꺼우면 구토를 하면서라도 참아내야 합니다. 물대포에 맞설 것이 아니라 피하면서, 방패와 맞부딪칠 것이 아니라 뒤로 물러나면서 참아내야 합니다. 그렇게 참아내면서 어깨동무를 해야 합니다.
아직 촛불을 끌 때가 아니라고 확신한다면, ‘될 때까지 모여라’고 외치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비폭력’을 외치고 ‘무저항’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것처럼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외침은 없습니다.
돌아보면 압니다. 경찰이 강경진압에 나선 때는 촛불을 든 시민이 가장 적을 때였습니다.
둘러보면 압니다. 고시 강행에도 불구하고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우려와 경계의 눈길을 풀지 않고 있는 시민이 다수입니다.
깊게 심호흡을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진 제공=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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